프롤로그 – 라디오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 시절 라디오는 모든 청춘들에게
구글이자, 네이버였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와 소식들, 음악들로 역동적이었던 짧은 생의 한 켠을 채우고 있다.
발라드 팝을 들으며 손편지를 쓰던 사랑의 메신저였다.
지금은 틴더나 글램같은 데이팅앱만 열면
몇 분이면 만남이 성사되겠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심야 라디오 방송을 켜고, 이불을 뒤집어 쓴채
심사숙고해 고른 예쁜 편지지와 서두를 장식할 글을 위해 시집 한 두 권은 필수였다.
지금은 영상이든 문자든
결론 먼저 넣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여유와 낭만이 넘쳤다.
“밤 12시, 라디오.”
7080 세대라면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추억이 있다.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며 잡음 사이로 새어 나오는
팝송 한 곡에 온 세상을 얻은 듯 설레었던 그 시절.
특히 1969년 시작된 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한국 청춘들의 밤을 수놓은 전설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이종환이 진행하던 70년대, 그리고 이문세가 11년간(1985~1996) 진행하며 ‘밤의 문교부 장관’이라 불리던 시절까지, 이 프로그램은 억압적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꿈의 세계였다.
라디오를 귀에 바짝 대고 작은 소리로 듣던
그 설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방송된 KBS 2FM의 ‘김광한의 팝스다이얼’은 한국 팝음악 전성기를 이끈 대표 프로그램이었다.
김광한의 해박한 팝 지식과 특유의 진행으로
80~90년대 팝팬들의 바이블 역할을 했다.
원곡의 정보를 얻기 어려웠던 시대 한글로 받아 적으며 LP를 사러 다녔던 기억이 선명하다.
1990년 3월 19일 시작된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송골매의 보컬에서 DJ로 변신한 배철수가 35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한국 록과 팝음악의 산 증인이 되었다.
이 세 프로그램은 각각의 색깔로 7080 세대의 음악적 감성을 키워냈다.
별밤의 서정적 감성, 팝스다이얼의 전문성,
음악캠프의 록 정신이 어우러져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황금시대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은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유신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카펜터스의 감미로운 멜로디는 금지된 꿈을 노래했고, 민주화 열풍과 함께 메탈리카의 격렬한 기타 리프는 젊은 영혼의 저항을 대변했다.
90년대, 문화 개방과 함께 머라이어 캐리의
환상적인 고음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그 시절 음악을 듣는 방식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LP 한 장을 사기 위해 용돈을 몇 달간 모았다.
워크맨으로 듣는 음악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였고, 친구들과 나누어 듣는 이어폰 한쪽은 우정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 팝송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말해주는 목소리였고, 숨 막히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다.
검열과 금지 속에서도 국경을 넘나드는 멜로디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70년대의 서정적 발라드는 억압된 감정의 은밀한 해방구였다.
카펜터스의 “Close to You”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I Honestly Love You”는
교복 입은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사랑을 대변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가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멜로디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을 울렸다.
80년대는 이중적이었다. 낮에는 에어 서플라이의 감미로운 발라드가 교실을 메웠고, 밤에는 메탈리카와 건스 앤 로지스의
강렬한 사운드가 대학가 술집을 뒤흔들었다.
민주화 운동과 함께 폭발한 저항정신은
헤비메탈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표출되었다.
장발의 로커들은 기성세대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90년대는 문화적 대전환의 시대였다.
머라이어 캐리와 셀린 디온의 파워풀한 보컬은
새로운 디바 시대를 열었고, 동시에 너바나와 펄 잼의 그런지 사운드는 기존 음악 질서에 균열을 냈다.
일본 음악에 대한 개방도 이루어져 X-Japan의 비주얼 계 록과 ZARD의 세련된 J-POP이 한국 청년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그리움’과 ‘저항’, 그리고 ‘꿈’이었다.
x-japan “endless rain”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음악은 위로이자 희망이었고,
때로는 분노의 출구이기도 했다.
CD가 LP를 대체하고, 노래방이 전국을 휩쓸며,
PC통신을 통해 음악 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디선가 그 시절의 노래가 들려온다면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시간은 흘러도 그 시절 들었던 노래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음악이 가진 마법 아닐까.